한국어 B형 간염 수기 공모 지인부문 1등상 수상작

안진숙 Jin Ahn

 

 

우리는 6남매다.

3남 3녀.

내가 늦둥이여서 바로 위의 다섯째인 둘째 언니와도 6년이나 차이가 나고, 큰오빠하고는 20년 차이가 난다.

큰오빠가 워낙 집 안팎으로 파워가 세서 동생들은 아버지보다 큰오빠 말을 더 무서워 했고 손가락 하나에도 좌지우지 되었다.

또한 큰오빠가 동생들을 신체적, 정신적으로 단련 시킨다는 명목 하에 새벽녘 동이 트기도 전에 동생 모두를 깨워 마당으로 집합시켜서 매일 거위걸음, 뜀뛰기, 줄넘기등 훈련시키고 기합도 많이 주곤 했었다.

 


큰오빠가 결혼하기 전까지 그 고난은 계속되었고, 나는 그 당시 어린애였어서 다행히 피해갈 수 있었다.

가장 피해를 많이 당한 사람이 셋째인 막내 오빠와 다섯째인 둘째 언니였다.

 


그렇게 큰오빠에게 시달리던 둘째언니는 언니 나이 22세때에 급성 간염에 걸렸다.

그 때 의사의 권유로 우리 가족 전체가 간검사를 하게 되었는데,

둘째 오빠만 정상이었고 큰오빠는 간경화, 큰언니와 막내오빠 그리고 나 이렇게 3명은 B형 간염 보균상태(*지금은 쓰지 않는 말입니다. 바이러스 활동이 없더라도 B형 간염 보유자나 만성 B형 간염 환자라고 부릅니다)라고 했다.


다들 청천벽력같은 검사결과에 ‘어떻게 이렇게 모두 다 간에 대한 병이 걸릴수가 있느냐며, 검사가 잘못된 게 아닌가하고 여러 병원을 다니면서 계속 검사했지만 결과는 모두 같았다.

가족 모두는 한동안 충격에 휩싸여 있었다.

 


그 때에 형제들 중 큰 오빠와 큰 언니, 작은 오빠는 각자 결혼해서 분가해서 살았고 막내 오빠는 직장이 지방이라 따로 살았기에 우리집에는 엄마와 아버지, 둘째언니와 나 이렇게 4명이 살고 있었다.

그당시 내가 고3이었기 때문에 엄마는 작은 언니에게서 옮으면 큰일난다고 피해 있을 겸 공부도 할 겸 동네 사설 독서실에 가서 언니가 다 나을 때까지 집에 오지 말라고 하시며 도시락과 갈아 입을 옷을 배달해 주셨다.

 


작은 언니는 그때부터 언니 방에서 격리 생활에 들어갔다.

방에 요강까지 넣어 주며 화장실도 같이 못쓰게 하고, 수건과 식기류 등 모든 것을 언니 것으로 따로 지정해서 분리해 놓고 생활했다.

그 방에서 나온 식기는 모두 뜨거운 물로 소독하였고, 언니 옷도 따로 삶아서 빨래를 했다.

그렇게 언니는 한달 가량 감금아닌 감금을 당했다.

 


지금은 코로나 시대라 자가격리라는 말이 생소하게 들리지 않지만, 35년 전 그 당시에는 이렇게 격리한다는것은 페스트에 버금가는 아주 큰 전염병일 경우에만 했던 거라 엄마는 동네 창피하다고 쉬쉬하며 어디 가서 말도 하지말라고 엄포를 내리셨었다.

 


간염이 다른사람에게 옮는다는 심각성 때문에 누구한테 옮길세라 오로지 언니를 철저히 격리하고 치료와 소독에만 집중하느라 언니가 심적으로 어땠을지를 헤아리는 정서적 배려 따위는 전혀 안중에도 없었다.

 


오히려 큰오빠는 식구들의 모든 간 관련 질병이 작은 언니 간염에서 시작된 거라며 자기의 모든 분노와 화를 작은언니에게 계속 퍼부었다.

세월이 지나고 보니, 사실 큰오빠의 간경화는 언니가 급성 간염 걸리기 훨씬 전에 진행 되었던 거라 언니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던 건데

그 당시에는 간염이 뭔지, 간경화가 뭔지 생전 처음 들어봤고,

간염이 전염성 질병이라는 것 외에는 다른 정보가 전혀 없던 터라

그냥 집에서 제일 큰 사람이 화가 나서 계속 언니 탓을 하니까 우리도 정말 언니 때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한 달 가량 언니는 방에 갇혀 지내다가 다 나았다는 판정을 받고 나서 수개월 후, 언니가 대학 때 친구의 고향집이 남쪽 끝 바닷가 앞에 있는 경치 좋고 한적한 곳이 있다며 거기에 가서 푹 있다 와도 되겠냐고 아버지께 여쭈었더니 바로 승낙해 주셨다.

평상시 같은면 꿈도 꿀 수 없는 얘기라 나는 너무 의아했다.

 


우리 아버지는 엄청나게 엄하고 보수적이셔서 언니들 중 그 누구 한명이라도 밤 9시 넘어서 들어오면 엄마를 포함하여 식구 모두가 단체 기합과 벌을 받았기 때문에 친구네 가서 자고 온다는 말을 꺼낸다는 건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런데 그것도 하루가 아닌 몇 달인데 그렇게 순순히 허락 하시다니 이게 무슨 일인가 나는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언니는 간염이 치료된 이후에 아주 심하게 우울증을 앓게 되었고 그래서 아버지는 공기 좋은데 가서 있다 보면 좀 나아질까 하는 생각에 허락하셨었다고 한다.

 


언니 나이가 그 때 22살.

어리다면 아직 어린나이였는데 방안에서 혼자 격리되어 고열과 구토, 복통을 오롯이 혼자 견뎌내며 받았을 고통, 정신적으로 느꼈을 두려움과 서러움은 누구도 상상할수 없을 만큼이었을 것이다.

어떻게 버텨 냈을까…

 


몸으로 느끼는 통증만으로도 버거웠을텐데 심각한 전염병으로 격리되었다는 수치심, 큰오빠의 독설로 인해 가지게 되었을 식구들에 대한 죄책감은 언니를 두번 죽이는 일이었을것이다.

나도 그 당시 언니가 병에 걸리자마자 부모님의 강제성 권유로 언니와 떨어져 지내다가 언니가 완쾌된 후 만났기 때문에 철딱서니없이 그저 언니가 여행간 것만 마냥 부러워 했었다.

 

 

그로부터 20년 후 언니는 간암 판정을 받았다.

다행히 1기에 일찍 발견해서 의사는 천운이라 했다.

지금은 수술받은지 15년이 지나 안정권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긴장은 놓지 않고 있다.

간염이라는 것이 예방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고, 걸린 후 완치되고나서도 간암으로 갈 수 있는 확률이 크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계속 주시하고 관리를 해야 하는 무섭고 질긴 질병이라는 것을 가까이에서 보며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그러면서 회고해 본다.

 

그 당시 간염이라는 병에 대해 확실한 지식이 있었더라면,
‘큰오빠의 말도 안되는 비난을 막을수 있었을 텐데…’
‘그러면 언니가 우울증도 걸리지 않았을텐데.. ‘
‘그러면 간암도 걸리지 않았을텐데… ‘ 라고.

 


아플 때 가장 가까이에 있는 가족으로 부터 위로의 말은 커녕 오히려 상처가 더 깊어졌을 언니를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으로 두고두고 가슴이 메인다.

 

♦ 당선소감

이메일 3줄 쓰기도 버거워하던 내가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될, 또 누군가에게는 정보가될 내용을 쓴다고 하니 후딱 한페이지를 넘겨 쓸 줄은 몰랐네요. 

당연히 저를 포함 모든 가족은 스페셜리스트를  정기적으로 만나며 간염을 잘 관리하며 건강하게  살고 있습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 예방과 정기검진으로 건강한 삶을 사시길 희망합니다.

 

안진숙

 

*편집자 주 1: B형 간염은 태어날 때 산모로부터 수직감염으로 옮는 경우가 많아 한 가정의 형제들이 B형 간염을 같이 가지고 있는 경우가 흔합니다.  수상자님의 언니분처럼 급성간염 증상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분들에게는 증상이 나타나지 않아 관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B형 간염 보유자/만성환자는 평생 정기적으로 간 상태를 모니터하면 건강하게 사실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2: B형 간염은 혈액이나 체액으로 감염되며 침이나 다른 매개체로는 감염되지 않기에 식사를 따로 하거나 옷이나 수건을 소독하는 행위는 B형 간염 예방과 큰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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