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 B형 간염 수기 공모 지인부문 3등상 수상작

브라이언 서 Brian Seo

 

 

지난 6월10일은 제 딸의 생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정확히 20년 전 6월10일은 저에게 있어서 전혀 다른 날이었습니다.

‘생체 간이식 수술’. 아버지와 제가 같은 시간, 같은 수술실로 들어간 날입니다.

오늘은 제 특별했던 기억을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이 특별했던 사건은 저를 그나마 조금이라도 긍정적이고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줬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비록 가로 31cm, 세로16cm의 크고 흉칙한 수술흉터가 남아있지만, 나중에 제 아들과 딸에게도 부끄럽지 않게 보여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희 (아버지와 나) 는 2001년 6월 10일에 간이식 수술을 했습니다.

제가 아버지께 기증했죠.

지금은 아주 옛날얘기처럼 느껴질 정도로 시간이 많이 흘렀네요.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회복도 빨랐습니다.

저는 그 당시 육군병장 이었습니다. 정확히 제대를 2개월 남기고 수술을 한 거죠.

지금에서야 농담처럼 얘기하지만 ‘아,이등병 때 수술 했으면 바로 군생활 끝 대학 복학!’ 이었겠지만, 아쉽게도 고생 다 하고 말년을 왕처럼 보내야 하는 시기에 수술을 하였네요.

 


수술하고도 바로 ‘의병제대’로 집으로 돌아와도 되는 상황었는데, 어리석은 건지 괜한 ‘남자의 자존심’ 인지 수술한 배를 움켜 잡고 부대로 복귀했습니다.

대대장님께서도 말리는 상황이었지만 그때 당시에 어떤 군인정신이었는지, 꼭 만기 제대를 하고 싶었던 제 의지를 대대장님도 말리지 못하시는 상황이었죠.

다른 한편으로는 만기제대가 아닌 의병제대로 인해 사회생활에서의 어떤 조그마한 영향이 있을 거라는 걱정도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 호주 시드니에 살고 있습니다.

아무도 군대에 대해서는 물어 보질 않죠. 돌이켜 생각해봐도 후회 하지는 않습니다. 무엇보다 더 아버지께서 생명을 이어 가실 수 있었으니…



아버지께서는 만성 C형 간염으로 젊은 시절을 보내시다가 간경화, 간암까지 간 것이었죠.

큰 수술 하시기 전까지는 다들 아시겠지만, 암전문 병원인 원자력 병원에 다니셨고요.

 


제가 휴가 나왔을때, 위정맥이 터져서 응급실에 같이 가서 심란한 상황을 직접 보게 되고, 가족회의가 열리며 그때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생소한 간이식 수술에 대해서 듣게 됩니다.

모두 출가한 누나와 형이 모두 자신들이 하겠다고 했고, 아버지께서는 절대 반대를 외치셨죠. 출가한 상태인데 사위, 며느리가 보는 시각은 다를 수 있다는 이유에서 입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하겠다고 했습니다.

막내이고,당시 군인이라 몸 상태가 최상일 것이고…

그런데! 아무도 반대를 안 합니다. 심지어 아버지께서도. 

‘아! 나구나! ok 할 수 있다! 하지 뭐’!

다행히 모든 조직검사들과 제 간상태도 훌륭해서 적합 판정을 받고 저는 다시 부대로 복귀해서 전화 한 통만 기다렸죠. 수술날짜요.

 

날짜가 잡히고 아산병원으로 군복 입고 갑니다.

그 당시 아버지께서는 6인실에서 수술대기하셨는데, 군복입고 입원실을 들어가자마자 아버지께서 저를 얼른 끌고 나오시더라고요.

나머지 5분들도 같은 간암환자들인데 복수가 엄청 차 있고 얼굴빛이 다른 상황이었습니다.

그분들에게 미안하신 생각이 들어서였지요.

수술은 둘째치고 병원에 한번도 입원도 안 해본 저였기에 군복에서 환자복으로 제 손으로 멀쩡하게 갈아 입었죠.

갑자기 환자가 된 셈이죠.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중환자실에서 고통스러웠습니다.

특히, 제 눈앞에 벽시계가 있었는데 시간이 참 안 간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마취 깨고 아산병원에서 오신  간이식 수술 세계 권위자이신 이승규 선생님께 군대식 경례를 했다고 합니다.

웬 군인 정신이 그때 도졌는지…

 


그 당시 우리 대대장님의 멋진 모습을 꼭 알려 드리고 싶습니다.

문병 온 병장들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수술 당일 아침. 간부를 포함한 모든 대대원들을 연병장으로 집합시키셨답니다.

그리고 모든 장병들에게, ‘우리가 가진 종교는 각자 다르니까, 각자 자기가 믿는 신에게 오늘 서병장과 아버지가 동시에 수술 하는데 성공적으로 끝날 수 있게 빌자’. 라고요. 멋진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보통은 제대하면 근무했던 군부대 근처에도 가기 싫어한다는데, 저는 대대장님 뵈러 제대 후 종종 찾아갔고 호주 오기 전에도 인사드리고 왔습니다.



성악을 전공하던 대학에 복귀했는데 담당의 선생님은 전공을 바꿔야 하지 않냐는 걱정을 하시기도 했습니다.

진로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던 중 2002년 초에 이 곳 시드니로 1년 어학연수를 오게 되었습니다. 

정말 매력적인 나라이며 도시였고, 지내면 지낼수록 저에게는 정이 가는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아내를 이곳에서 공부하다가 만났습니다.



한국에서 아내의 집에 처음으로 인사 드리던 날이 생각나네요.

첫인사를 드리고, 아무래도 처음에 이런 큰 수술이 있었다고 말씀을 드려야 하는 게 맞는 것 같아서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물론 무슨 작은 칭찬을 듣자는 것은 당연히 아니었고요.

말 그대로 시각이 다를 수 있으니까요.

맛있게 식사하고 집에 왔더니 지금의 아내, 그 당시 여자친구가 제게 눈물로 전화를 했습니다.

 


“그런 큰 수술은 잘한 것이지만, 지금은 젊어서 아무렇지도 않지, 나이 들면서 어떻게 될지 모른다” 라는 걱정을 여자친구의 아버지가 하신다고 울면서 전하더군요.

심각한 상황이 온 것이지요.

이 이야기를 우리 아버지께서 들으시면 얼마나 슬퍼하실까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우리의 사랑은 문제 없었지만, 만남이 삐그덕댔고, 그렇다고 예비 장인어른을 원망하지는 않았습니다.

충분히 이해가 가는 부분이지요.

 


하지만! 저희의 기도를 들으셨는지 장인 어르신이 친구인 의사분이 계셔서 자세하게 여쭤보신 모양입니다.

당연하죠. 딸이 사윗감을 데려왔는데 장기(간)를 70% 나 떼었내었다니…

그 의사 선생님의 대답은 한마디로 전혀 문제 없고, 오히려 대단한 사윗감이라고 저를 칭찬해 주셨다고 하더군요.

전혀 모르시는 분이 저희에게 큰 힘이 되어 주신거죠.

그 다음이 히트입니다.

두번째 만남에서부터는 제가 성씨가 서씨인데 바로 ‘서서방!’이라고 부르며 사위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당시 학생신분이었지만, 2004년에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2001년 6월 제 간을 받으시고 건강히 사시다가  2007년 1월에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수술 이후로 간 문제는 없었던 걸로 알고요.

2003년 그리고 2005년에도 호주에 어머니랑 오시고 좋은 시간도 많이 보냈습니다.

그래도 자식 입장으로서 10년, 20년 이상 더 사셨으면 했던 바람은 여러분도 너무나 더 잘 아시겠지요..

특히나, 임종을 지키기 위해서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미친 사람처럼 흐느끼며 10시간을 날아가던 생각을 하면 아직도 가슴이 메어집니다.



감사하게도 가족은 그때 당시 한국에 다 있어서 아버지의 마지막을 기다릴 수 있었고, 저는 시드니에서 10시간 날아가서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보게 됩니다.

거의 의식이 없으신 채로 마지막 순간을 기다리셨다는데, 제가 도착하고 가족들이 모두 아버지 깨우고 막내 왔다고 하니 아버지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저를 확실히 알아보시고 환하게 웃으십니다.

손발 꼼짝 못하시는 분이 손을 번쩍 들어서 제 볼을 만지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편하게 가셨습니다.



하늘나라에 계시는 제 아버지께서는 현재 하이스쿨에 다니는 제 아들도 못보셨어요.

아버지가 소천하신 것은 2007년이고 제 아들은 2008년에 태어났으니까요.

그 부분이 정말 마음이 아프지만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아주 간단하게 마무리!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잘 하십시다.

 

비교적 어린 나이 23세에 제법 큰 수술을 했습니다.

20년 후인 지금은 의술은 더 좋아졌지만, 기증자인 저도 당시에는 위험할 수도 있는 수술이었고요.

수술 전날, 담당의사한테 여러가지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 자리를 피해 있었어야 했는데 고스란히 다 들었지요.

내용인즉슨, 이렇게 될 수도 있다, 저렇게 될 수도 있다 라는 부정적인 발언들과 혹시라도 있을 사고를 대비한 병원 측의 입장, 그리고 보호자의 싸인.

무서웠습니다. 잘 못 될 수도 있다고 해서요.
하지만 모든 게 잘 되었습니다.

제가 꼭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지금부터입니다.



몸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뭔가 내적인 변화. 삶이 조금은 달라져 보이는 겁니다.

이렇게 살면 안되겠다 같은 느낌이죠.

글로는 표현이 참 어려운데, 세상은 아름답고 충분히 살만한 가치가 느껴진다고 할까요..

제대로 잘 살아야지 하는 건데, 돈을 많이 벌어 잘 살아야지 하는 것과는 다른.

 


조금 더 잘 먹고 잘 살려고 우린 노력하고 있지만, 지금도 많은 간질환 환자분들은 기증자 혹은 뇌사자 등의 간을 기다리며 겨우 목숨을 이어가고 있는 분들도 많습니다.

 

의학이 발전 되어서 간질환은 충분히 미리 막을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나중에 몸과 마음이 더 힘들기 전에 미리 건강진단도 받으시고 인터넷에서 떠도는 이야기들 말고 현직에 계신 의사 선생님에게 정확한 진단과 예방책을 받아서 적어도 우리 교민들은 간과 관련된 질환을 얻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야기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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